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로 여성, 환경, 경제,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운동이 활발해졌는데 농민운동이 이 흐름에 동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평택농민회가 창립한지 5년째가 되는 해인 1992년에는 14대 국회의원 선거가 3월에, 14대 대통령 선거(이후 대선)가 12월에 있었다. 특히 12월에 있었던 대선은 재야 민주화세력과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합하여 만든 ‘전국연합’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정책연합을 하여 시민단체의 직접적인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선거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전장웅 회장이 평택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의 최일선에 서게 된 이유는 평택농민회가 소속되어 있는 전국농민회가 ‘전국연합’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였다. 그 당시 야당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중립적이어야 할 경찰들이 집권여당의 수족이 되어 야당의 선거운동만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랬다. 결국 전 회장은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이 사건은 당시의 긴장된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를 한달 정도 앞둔 어느 날 우리 농민회 회원들은 늦
전장웅 초대평택농민회장은 1954년 2월 현재 살고 있는 포승면 원정리에서 4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식인가가 나지 않은 중학교를 중퇴하였기 때문에 그의 최종 학력은 국졸이다. 중학교 중퇴 후 누나와 매형이 살고 있던 논산에서 매형의 가게 일을 거든 1년 정도를 제외하고 그는 포승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포승면 원정리는 수십대를 이어 살아온 조상의 숨결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의 선친은 일제강점기에 북해도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 반장의 부당한 처사에 시달리던 그의 선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일본인 반장을 때려눕히고 목을 짓밟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일본인 반장의 괴롭힘이 줄었다고 한다.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는 내 성격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며 전 회장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부역은 부역인지라 힘겹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몸도 지치고 마음도 내키지 않아 일하러 가지 않고 숙소에 머물다가 일본인 반장에게 걸려 귀싸대기를 맞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갱도가 무너져서 수십명의 한국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었다고 말씀하
전장웅 초대 평택농민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9월 4일과 14일 특별한 질문 없이 자유롭게 진행됐다. 평택농민회 회장이 되자 이장 직책을 맡고 있었던 그는 면장과의 적절한 관계 설정을 위하여 이장직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가 이장을 그만둔다고 하자 포승면 공무원들은 골칫거리가 사라진다며 환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후임으로 배호식(수세대책위원장)을 추천하자 포승면 담당자는 ‘이장 임면에 관한 조례’를 내세우며 난색을 표했다. 조례에 따르면 30세 미만은 이장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0세 미만은 이장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은 배호식이 이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아무튼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조례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그는 무릎을 탁치며 즉시 한동섭 포승면장을 만나러 갔다. 2월의 날씨는 쌀쌀했다. 포승면사무소 안에는 조개탄으로 뻘겋게 데워진 난로 위에 주전자의 물이 펄펄 끓고 있었는데 바로 그 앞에 면장이 혼자 앉아있었다. 전장웅 회장은 면장에게 “이장 임면에 관한 조례에 30살 미만은 안된다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30세’라고 적혀있으면 저도 할 얘기가 없었을
'수세'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 수리조합령'에 따라 <수리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생겼다. <수리조합>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토지개량조합>으로, 1971년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효되면서 <농지개량조합>(이후 농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부나 농조에서는 '조합비'라 하였지만 해마다 강제로 부과되는 세금과 같아서 농민들은 이를 '수세'라 하였다. 수세는 댐과 저수지, 수로 등의 건설과 관리유지 및 직원 인건비 등으로 쓰였다. 물을 사용하지 않은 농민이라도 300평당 수십 kg의 벼를 1 년에 한 번씩 <농지개량조합>에 수세로 내야 했다. 수세는 현물로만 부과되었기에 쌀값이 오르면 덩달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의 경우 전국 농민이 부담한 수세 총액은 8백10억원, 논 3백 평당 1만8천9백3원이었다. 이렇게 해마다 오르는 '수세'에 농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세거부운동의 진원지는 전남 해남이었다. 87년 11월26일 해남 장날을 맞아 부당수세거부 군민결의대회를 열렸는데 3천여명이 몰려나왔다. 동학 이래 최대의 농민 인파였다고 한다. 이날 농민들은 "수리시설은 국가가 부담해
1988년 12월 26일 그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울산현대중공업 파업 농성장을 찾아가 ‘노동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 발언을 꼬투리 잡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장은 ‘3자 개입 금지’ 위반으로 그를 노동부와 검찰에 고발했으나 그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80년 국보위 입법회의에서 삽입한 독소 조항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국민은 악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자신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사람 대접 받고 싶으면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라는 구절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 인터뷰 기사를 노무현 대통령의 현대중공업 연설로 시작한 이유는 그 시점과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에서 언급한 ‘악법에 대한 저항’과 ‘의리’가 오늘 만난 인터뷰의 주인공인 이 사람과 겹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1988년 12월 26일은 ‘평택농민회 창립 준비위원회 결성식 및 수세 거부 평택군민 결의대회’가 평택 소재의 안중누가회관에서 개최된 날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이 후에 벌어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는 다시 농민운동으
故 송 운 례(92세)님께서 07월07일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빈소 : 시티장례문화원 - VIP 202호 발인 : 2024년07월09일 (화) 오전 09시00분 장지 : 김제용지선영 슬픔에 잠긴 유족들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작권자 ⓒ 아침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