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26일 그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울산현대중공업 파업 농성장을 찾아가 ‘노동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 발언을 꼬투리 잡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장은 ‘3자 개입 금지’ 위반으로 그를 노동부와 검찰에 고발했으나 그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80년 국보위 입법회의에서 삽입한 독소 조항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국민은 악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자신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사람 대접 받고 싶으면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라는 구절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 인터뷰 기사를 노무현 대통령의 현대중공업 연설로 시작한 이유는 그 시점과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에서 언급한 ‘악법에 대한 저항’과 ‘의리’가 오늘 만난 인터뷰의 주인공인 이 사람과 겹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1988년 12월 26일은 ‘평택농민회 창립 준비위원회 결성식 및 수세 거부 평택군민 결의대회’가 평택 소재의 안중누가회관에서 개최된 날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이 후에 벌어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는 다시 농민운동으로 확산되는 등 다양한 대중운동의 강풍이 되어 전국을 휩쓸었는데 그 한복판에 평택의 농민들이 우뚝서게 된 것이다.
평택 농민운동의 맨앞에는 오늘의 주인공 전장웅(초대 평택농민회장)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포승읍 원정2리 이장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역설한 사람은 장순식(현 김대중 평택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그런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장순식의 제안을 듣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평택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초대 평택농민회장이 된 그는 그 당시 전국 농촌에서 들끓고 있던 ‘수세 거부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끈 평택 농민들의 ‘수세 거부 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언론의 취재가 용이한 수도권의 농촌지역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며 겸손해 하였지만 그의 활동과 성과가 기사거리가 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면 지속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2 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