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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초대 평택농민회장 전장웅[5편]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로 여성, 환경, 경제,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운동이 활발해졌는데 농민운동이 이 흐름에 동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평택농민회가 창립한지 5년째가 되는 해인 1992년에는 14대 국회의원 선거가 3월에, 14대 대통령 선거(이후 대선)가 12월에 있었다. 특히 12월에 있었던 대선은 재야 민주화세력과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합하여 만든 ‘전국연합’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정책연합을 하여 시민단체의 직접적인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선거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전장웅 회장이 평택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의 최일선에 서게 된 이유는 평택농민회가 소속되어 있는 전국농민회가 ‘전국연합’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였다. 그 당시 야당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중립적이어야 할 경찰들이 집권여당의 수족이 되어 야당의 선거운동만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랬다. 결국 전 회장은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이 사건은 당시의 긴장된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를 한달 정도 앞둔 어느 날 우리 농민회 회원들은 늦은 시간까지 선거관련 회의를 하려고 사무실에 모여 있었어. 밤 9시경 누군가 우리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와서 농민회장를 찾았어. ‘내가 회장인 전장웅인데...’라고 말하자 평택경찰서에서 왔다며 동행을 요구했어. 나는 영장부터 확인하자고 했지. 그러자 그는 영장은 없으나 조금 알아볼 일이 있으니 회장님만 동행해 주시면 된다며 젊잖게 권유했어. 나는 영장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며 동행을 강력하게 거부하였지.”

 

“갑자기 인솔자로 보이는 자가 ‘잡아 들여’라고 소리치자 방위병 포함 경찰 너댓 명이 군화발로 사무실에 들이닥치며 나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어. 7~8 명 정도 되는 우리 회원들이 그들과 맞서며 한참 동안 몸싸움이 일어났지. 인원이 서로 엇비슷하여 실랑이가 길어졌어. 나는 이 상황이 더 길어지길 원했어. 저들이 영장 없이 나를 강제로 연행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러야 법적으로 내가 유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 한참의 옥신각신 끝에 그들은 나를 끌고 나가서 그들이 몰고 온 차에 강제로 태웠어. 차에 탄 그들은 깡패 같았어. 욕설과 폭력으로 나를 제압하려고 했지.”

 

“나는 평택경찰서 조사실에 들어서면서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았어. ‘결국 콩밥 먹는 신세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 경찰조사관은 당원증을 제시하라며 강압적 어투로 말했어. 나는 이미 대선 캠프의 일원으로 당원증을 마련해 둔 터였기 때문에 ‘당신들이 나를 조사할 때는 기본적인 것을 알고 나서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며 ‘지금 당장 선관위에 전화 한 통이면 확인될 것이 아닌가’라고 언성을 높였지.”

 

“당연한 내 항변에 그는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가 발행한 선거용 유인물을 꺼내 놓았어. 그 유인물 상단에는 ‘평택농민회장 전장웅 / 평택성공회 신부 이재복’이 대표 발행인으로 찍혀있었지. 그 유인물에는 ‘김영삼은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 정당의 수장이니 그를 이번에 찍어서는 안된다’는 선거법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 회원들에게 그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선거법 위반 내용이 들어있으니 배포할 때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했었지. 게다가 그 조사관은 평택극장 앞 도로에서 농민회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유인물을 뿌리던 장면이 담긴 사진을 의기양양하게 내밀며 나를 압박했어.“

 

“나는 ‘아니, 여기에 당신 이름을 써놓고 뿌리면 당신이 책임질거요?’라며 오히려 큰 소리로 되물었지. 그는 할 말이 없었어. 농민회는 법인이 아니라 임의단체였기 때문이야. 임의단체에서 발행된 유인물에 발행인으로 적혀있다고 해서 함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지. 더구나 그가 꺼내놓은 사진들 속에는 내가 없었어. 유인물을 배포할 당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정보과 형사가 몰래 다가와 내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귀띔을 해주어 내가 그 현장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조사를 받으며 사방을 둘러 보던 중 좀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평택농민회 전장웅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 찬조연설을 했는데 농민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을 보게 되었어. 그 기사는 빨간 색연필로 표시되어 있어 유독 눈에 띄였지. 나는 얼른 일어나서 테이블에 있는 신문을 집어들고 조사관 앞에 내밀며 ‘당신들, 이것 때문에 날 끌어들인 거냐’고 큰소리로 따졌어.”

 

 

“그러자 그 조사관은 ‘암만 그래도 소용없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사진을 내밀었어. 그 사진은 대학생들이 마당극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특정 인물을 가리키자 거기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김영삼’을 외치던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지. 조사관은 ‘이것도 오리발을 내밀거냐’며 마치 나의 범죄혐의가 완벽하게 입증된 것처럼 말하였어. 그 사진 속에서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였어. 그런데 앞이 아니라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지. 나는 ‘무슨 소리여. 이게 당신 손이여 내 손이여. 난 당신 뒷통수로 보이는데. 이 사람이 나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어’라며 오히려 더 당당하게 소리치며 다부지게 나갔지.”

 

 

“그러자 조사관은 당황했고 심지어 겁을 먹기 시작했어. 제1야당 연설원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지. 나는 이 때다 하고 더 세게 몰아붙였어 ‘당신들은 나를 강제로 연행해 왔어. 불법감금이야. 내일 아침에 한겨레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리는지) 봅시다. 당신 모가지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보자’며 대차게 말했어.”

 

“겁먹은 조사관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윗선에 전화를 걸더라. 조금 뒤 풀어주라는 명령이 떨어졌는지 그 조사관은 나한테 누가 신병인도를 할 수 있냐고 물어봤어. 그 때가 한밤중인 오전 1시 30분경이었어. 그렇게 늦은 시간에 신병인도를 위해 나올 사람은 없었지. 날이 샐 때까지 꼼짝없이 경찰서에 있어야 될 판이었어.”

 

“그런데 바로 그때 평택농민회 조광현 부회장이 조사실 안으로 들어왔어. 그는 내가 경찰에 끌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46명의 평택농민회 회원과 대학생들이 모여 평택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지. 때맞춰 들어온 조 부회장이 신병인도를 해준 덕분에 나는 무사히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어.”라며 전 회장은 그 당시를 회상했다.

 

1992년 대선은 평택농민회를 포함해 전국에 있던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총결집했던 선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당시 시민단체들의 선거운동은 실패하기는 했지만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게 함으로써 민주화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시민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있다.(6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