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 수리조합령'에 따라 <수리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생겼다. <수리조합>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토지개량조합>으로, 1971년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효되면서 <농지개량조합>(이후 농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부나 농조에서는 '조합비'라 하였지만 해마다 강제로 부과되는 세금과 같아서 농민들은 이를 '수세'라 하였다.
수세는 댐과 저수지, 수로 등의 건설과 관리유지 및 직원 인건비 등으로 쓰였다. 물을 사용하지 않은 농민이라도 300평당 수십 kg의 벼를 1 년에 한 번씩 <농지개량조합>에 수세로 내야 했다. 수세는 현물로만 부과되었기에 쌀값이 오르면 덩달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의 경우 전국 농민이 부담한 수세 총액은 8백10억원, 논 3백 평당 1만8천9백3원이었다. 이렇게 해마다 오르는 '수세'에 농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세거부운동의 진원지는 전남 해남이었다. 87년 11월26일 해남 장날을 맞아 부당수세거부 군민결의대회를 열렸는데 3천여명이 몰려나왔다. 동학 이래 최대의 농민 인파였다고 한다. 이날 농민들은 "수리시설은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간접자본인데 그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며, 일제강점기 조선농민 수탈수단으로 강구되었던 것이 해방 후 40년이 넘도록 유지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울분을 토했다.
해남에 이어 수세거부운동이 가장 큰 규모로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나주였다. 87년 12월29일 <부당수세거부 나주농민 결의대회>에는 나주 농민 1만여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이 결의대회에서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 수세 절대 못내>가 수세거부운동의 구호로 채택되었다. 1988년 11월1일 <전국 수세폐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수세거부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한편 평택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전장웅이 평택 시민과 농민은 물론 평화민주당 당원들과 함께 ‘수세거부’의 정당성을 알리는 수천장의 유인물을 평택 농촌지역 구석구석에 배포하며 평택 농민의 힘을 모으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평택 수세거부운동의 중심에 섰던 전장웅은 1988년 12월 26일 300 여명의 농민들이 참석한 <평택농민회 창립 준비위원회 결성식 및 수세 거부 평택군민 결의대회>에서 초대 농민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그 외에 이천세·조광헌·곽종근(부회장), 배호식(수세대책 위원장), 전성일(사무국장) 등이 초대 평택농민회를 이끌어 갔다.
평택농민회는 초대 농민회장인 전장웅을 주축으로 농민 수백명이 참여하는 집회를 수차례 열어 수세폐지 서명, 수세납부 거부, 고지서 소각 등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1989년 2월13일 여의도에서 열린 <수세폐지와 고추생산비 보장 전국농민대회>에 수십명의 평택 농민을 이끌고 참가하여 수세폐지에 대한 평택 농민들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후 300평당 벼 23-28Kg이던 수세는 5Kg으로 대폭 감소되었다가 1997년에 완전히 폐지되었고, 징수기관이던 농지개량조합도 2005년 한국농어촌공사에 흡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는 평택농민회를 비롯한 전국 농민들의 피땀어린 투쟁의 결과이다. (3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