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웅 초대평택농민회장은 1954년 2월 현재 살고 있는 포승면 원정리에서 4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식인가가 나지 않은 중학교를 중퇴하였기 때문에 그의 최종 학력은 국졸이다. 중학교 중퇴 후 누나와 매형이 살고 있던 논산에서 매형의 가게 일을 거든 1년 정도를 제외하고 그는 포승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포승면 원정리는 수십대를 이어 살아온 조상의 숨결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의 선친은 일제강점기에 북해도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 반장의 부당한 처사에 시달리던 그의 선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일본인 반장을 때려눕히고 목을 짓밟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일본인 반장의 괴롭힘이 줄었다고 한다.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는 내 성격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며 전 회장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부역은 부역인지라 힘겹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몸도 지치고 마음도 내키지 않아 일하러 가지 않고 숙소에 머물다가 일본인 반장에게 걸려 귀싸대기를 맞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갱도가 무너져서 수십명의 한국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었다고 말씀하셨다”며 그는 선친의 지난 일을 회고했다. 그의 선친은 지친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가혹했고 생사를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하시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웅 회장은 어릴 때부터 그의 선친에게서 ‘아는 글자가 되레 근심이 된다’는 뜻의 ‘식자우환(識字憂患: )’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며 배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해질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한 그의 선친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세상을 더 편하게 사는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같다.
그는 “21살 때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평택 시내에 있는 성동국민학교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난생처음 포승을 벗어나 낮선 도회지로 간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그는 아주 순박한 ‘촌사람’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조그만 개척교회를 열고 있었던 이정구 목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농사나 짓고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을 잘 따르는 그저그런 시골 청년에 불과했지”라며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정구 목사와 함께 농촌 청년들을 모아 ‘새벽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 모임의 회장이 되어 서울 등지에서 농활을 하러 내려온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지”라며 그의 젊은 날를 회상했다. 이렇게 그는 ‘식자우환’의 삶에서 ‘아는 게 힘’인 세상으로 나아갔다. 훗날 평택농민회를 조직하고 이끌어 갈 때 동네 청년들의 모임인 ‘새벽회’는 그에게 큰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장웅 회장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도합 8년을 평택농민회 회장으로 있었다. 1991년 1년동안 그가 회장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던 이유는 ‘경기도 농민회 창립 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수행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평택농민회를 이끌면서 △‘수세거부 운동’ △‘2.13 여의도 농민대회(1989)’ 참가 △‘쌀 생산비 보장 및 전량수매쟁취 평택농민 결의대회(1989)’의 성공적 개최, △‘평택농민 신문(1989)’ 발행, △‘수입개방저지와 UR(우루과이라운드) 재협상을 위한 국회 농성 투쟁’, △농촌활동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진행을 위한 ‘평택군 농민·학생 연대추진위원회’ 구성, △‘UR 재협상 쟁취 국회비준 거부와 농정 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수많은 활동을 하면서 평택 농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끊임없이 일했다.(5편으로 계속)